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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Hesse after 9 years

일본 여행에 다녀오는 동안 세 권의 책을 읽었다. 비행기, 대중교통, 식당 웨이팅 사이사이 따분해질 즈음 책을 읽으면 굉장히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야의 이리 · 금각사 · 싯다르타

책을 자주 읽는 친한 친구에게 아무 책이나 추천해달라고 했는데 상술한 책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몇권의 책들을 추천해주었다. 이 가운데 세 권을 읽었다. 헤세의 책을 읽게 된 건 꼭 9년만이다.

지금은 책을 많이 읽지 않지만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책을 많이 읽었다. 학교 도서관이 좋기도 했고, 옛날 사람들이 무슨 생각 하는 지 들여다 보는게 재밌었다. 허영심도 조금 있었던 것 같다. 파우스트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는데 그냥 끝까지 읽었던 기억이 있다. 단테의 신곡, 데카메론, 데미안이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다.

당시 데미안에 대해서는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 소설이지만 자전적인 문체가, 싱클레어가 괴로워하는 모습이, 데미안이 던지는 질문들이 괜히 와닿았다. 개인적인 경험과 당시 다니던 고등학교의 환경, 즐겨듣던 음악 등 복합적인 맥락이 당시 감정의 출처로 작용하였다. 헤세의 저서들에도 헤세 본인의 경험과 더불어 많은 시대적인 요소가 작용한 것과 같다.

데미안이 나오고 3년 뒤에 나온 싯다르타, 또 그로부터 5년 뒤에 발간된 황야의 이리 뒤에는 각기 다른 헤르만 헤세의 생각이 담겨 있었다. 9년이 지나서야 그 변화를 쫓았다.

싯다르타

너무 지나치게 똑똑하지 않도록 경계하시오

삶에 대해서는 앞으로 깊이 사색하지 않는 게 좋겠다. 책을 다 읽고, 황야의 이리가 싯다르타로부터 5년 뒤에 발간되었다는 걸 알게 되고 생각했다.

헤세는 이 책에 위대한 생각을 담았다.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것. 이것은 너무나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좇아야 하는 가르침도 없는 것이다. 헤세는 데미안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니체와 헤세는 사는 동안 종교가 과학에게, 낭만이 전쟁 앞에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다. 데미안에서도 니체가 몇 번 언급된다. 사람들이 아주 오랜 시간 기대어 살아온 가치나 신념이 와르르 무너지면 제 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한테 기대서 살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 것이다. 내가 나한테 기대서 살 수밖에 없다면, 수많은 책, 말씀, 가르침보다 근본적인 진리나 원리가 사람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독일인들은 원리를 참 좋아한다. 합성어가 많은 언어 영향일까? 1학기 교양에서 켈젠의 근본규범에 대해 알게 됐는데 법에 대해서도 이런 식으로 근본적인 원리를 찾아내려고 하던게 기억이 난다. 켈젠은 헤세와 동시대 사람이다. 아무튼.

헤세 또한 - 그러한 맥락에서 - 본인 내면으로부터 무언가 발견하기 위한 긴 여정을 살았고, 프로이트와 융의 이론, 동양 철학의 힘을 빌렸고, 사색하고 글을 썼으리라. 정말 좋은 글들을 남겼다. 독일 전장에서부터 미국 히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세대와 정신이 그의 글에 의지했다.

그의 곤경과 고뇌는 대부분 비슷하지만, 그 결론이 향하는 곳은 저서마다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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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에서 헤세는 주인공이 ‘범아일여 (梵我一如)’ 를 체험하는 여정에 대해 그린다. 모든 걸 비워도 보고 모든 걸 겪어도 보는 과정에서 자기(自己)라는 개념이 끝내 옅어지고, 세상과 하나가 되어 만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 작가는 나와 세상의 통합, 완성의 소리, 옴(Om) 과 같은 표현을 빌려 그것을 기록한다.

그는 싯다르타를 집필하다가 우울증에 걸리고 약 1년 반 동안 내면에 대해 체험하는 시간을 거쳤다고 한다. 회복 후 싯다르타를 마저 집필하고 발간할 수 있었다고 한다.

헤세는 그 치료 과정에서 옴을 경험한 것일까? 그 후로 광명을, 안정을 찾았을까? 황야의 이리를 보면 알 수 있을까?

황야의 이리

언젠가는 체스 말 놀이를 더 잘할 수 있겠지. 언젠가는 웃음을 배우게 되겠지.

헤세는 싯다르타를 내고 2년이 지나던 해 이혼과 두 번째 결혼을 한다. 그러나 두 번째 결혼마저 실패하면서 또 다시 우울증으로 고생한다. 그러다 꼬박 쉰 살이 된 1927년에 황야의 이리를 발간한다. 책을 내기 1년 전에, 어떤 무도회에서 강렬한 환락 파티를 경험했다고 하는데, 그러한 경험이 황야의 이리 속에 녹아있다.

그는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별다른 광명과 안정을 찾지 못했다. 똑똑하고 섬세하고 혼란스러운 모습의 중년이 됐을 뿐이다.

황야의 이리는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성찰적인 작품이다. 내리 이어져온 작가의 고뇌와 관련한 맥락에서 보면, ‘유머’ 라는 새로운 탈출구가 제시된 작품이기도 하다.

앞선 그의 저서들과 똑같이, 이번에도 주인공은 방황하는 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이 배우는 것은 다만 진지함을 내려놓는 법이다. 자아의 개성과 현실의 긴장을 해소하려면, 다만 모든 일을 가볍게 생각하라는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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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헤르미네라는 소녀와의 교류로부터 배운다. 그러나 그 배움을 완전히 실천하는 데에 실패한다. 끝내 실수를 저지르고 나서야,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에 대한 메시지를 남기는 것을 끝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중반부까지는 너무 좋다가, 후반부부터는 헤르미네를 포함해 주인공이 겪는 일들이 이해가 안되고 그냥 정병 소설같아서 어지러웠다. 마무리에 대해서도 이러한 찜찜함을 구태여 왜 남긴 건지 모르겠었다.

작가의 개인적인 감상과 결부해서 이해해보려고 노력하자면, 아무래도 본인의 삶 속에서 만난 곤경들, 그리고 늙어버린 본인의 모습들이 소극적인 전개로 작품에 녹아든 것은 아닌가 싶단 생각을 해본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정도면 충분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놀라운 일이다. 유리알 유희는 아직 읽어보지 않았고 읽어보겠지만, 크게 기대가 되지 않는다.

철학가들은 예민하고 섬세한 면모를 가져서, 현실과 이상의 괴리 속에서 고통 받고, 살아감에 있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 지 공들여 사색한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고통과 고독을 선사하는 것 만큼이나 안정과 행복을 선사하는 것 또한 현실이다.

그냥 범아일여 정신으로 살자. 이런 생각들을 쫓기에는 현실이 너무 복잡하고 바쁘다. 이들의 생각이 무가치하지는 않고 오히려 아주 큰 도움과 고양감을 주기는 하지만, 침잠하자면 끝도 없이 빠져들 수가 있는데, 그렇다고 결론이 크게 바뀌느냐 하면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생각의 덫이 현실이 선물해 줄 수 있는 순간들을 전부 놓쳐버리게 만들 위험이 있을 뿐이다. 인생, 자아 같은 것들에 대한 생각은 적당히, 가끔씩만, 힘들 때마다 꺼내보고, 조금 내려놓는 용도로만 쓰면 될 듯 하다.

금각사

미지의 세계란 견딜 수 없다

금각사는 재미는 있었으나 큰 몰입이 되지 않았다. 비평에서는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벌크업을 하는 과정에서 본인 내면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작품에 투영하는 방식으로 저술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신선한 관점이었으나 그것이 작품의 전부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문체가 수려하고, 묘사가 아름답긴 했으나 탐미주의라는 것이 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주인공의 뒤틀린 심사에 공감하게 만드는 작가의 필력이 대단히 느껴졌다.

책을 읽고 무언가 내게 투영할 만한 생각이 남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