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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없음에 관하여

올해의 11.65% 시점에 또 하나의 글을 쓴다. 지금까지 내게 올해 일어난 일들은 긍정적이거나 어떤 성취를 이뤘다거나 하는 것들은 없다. 부끄러움을 느낀다.

SaaS 제품을 만들고 있었고, 초안을 만들었고, 피드백을 받고 있다. 그러나 만드는 데에 집중하는 만큼이나 알리고 구매 의사를 묻고 피드백을 받지 못했다.

1월에는 피부과 마취크림을 바른 후에 화상처럼 피부염이 생겨 한 주 내내 집에 있어야 했다. 좀 나은 듯 하여 며칠 외출을 한 후에는 심한 목감기가 생겨 아직도 낫지 않았다. 숨 쉬듯 기침을 하고, 잠들기 전에는 20분 정도는 콜록대는 것 같다.

보다 건강해지려고 포리지, 블루베리, 흰 살 생선 등을 요리해서 먹고 있었다. 영양제도 챙겨먹고, 수면 습관도 10~6시 로 완전히 바꾸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이번 몇 주 간의 잔병치레가 더 무기력하고 우울했다. 처음으로 항우울제를 처방받아야 했다.

올해를 시작하면서 헤세의 책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삶에 어떠한 정답이나 당위도 없다는 것, 그냥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살아가는 정신을 배웠다. 마음이 가벼워지는 체험을 했고, 열심히 해보기로 했던 창업이라는 도전에 대해 좀 더 초연히 임하는 동력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근데 나는 헤세를 재현하고 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건강이라는 환경이, 부정적인 생각이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이전 글에서 정확히 허무하다 느꼈던 바로 그 지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 앞에서 너무나도 취약하다.

AI 는 쉴 필요가 없다. 요즘은 Openclaw 가 화두이고, 당장 작년 여름에 나 또한 쉬지 않는 코드 에이전트를 만들고 싶어했다. 잠시 고장이 난 내게는 쉬지 않는 AI 가 날 대신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하루 하루 뒤쳐진다는 생각을 했다.

아픈 며칠 동안 나는 일을 더 열심히 할 수 없었고, 다시 삶과 존재, 세계관에 대한 생각을 했다.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았고, 책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다.

또 똑같은 수렁이겠지 싶었다. 근데 기침 때문에 작업에 집중이 너무 안돼서, 알고도 그냥 봤다.

영화는 다정함 (명랑한, 친절한) 이 삶의 허무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책은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영화에는 공감할 수가 없었다. 따뜻한 영화의 메시지가 내게는 적용 불가능한 어떤 것으로 느껴졌다.

Q.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A.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모르니까. Be kind.

알겠다. 알겠는데, 그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모르겠는 그게 내가 풀고 싶은 문제라서 그렇다. 분명 아무렇게나 살고 다정하기만 하면 되는게 아닐텐데.

그렇게 찜찜한 채로 있을 수가 없어서, 다음 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빌려 읽었다. 내가 답을 얻고 싶어하는 것은,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키치였다.

einmal ist keinmal.

고작 한 번 살아갈 뿐인 우리들 존재는 너무나도 가볍다. 키치라는 것은 가벼움에 대한 부정이다. 키치는 인간이 본인의 시야 안에서 용납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표상이다.

체제에 헌신하는 것이 중요한 시대에 태어나 일평생을 바친 누군가

돈을 많이 버는 것

화성에 가는 것

가족애와 사랑

이 모든 것이 키치 삶은 진정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이 가볍고 인간은 살아가는 한 그걸 견디지 못해서 어딘가에 의미를 부여한다.

오케이. 오케이?

나는 지금 의미를 부여할 키치를 찾고 있는 거다. 여기서 또 한 번 길을 잃는다.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어떻게?

일론 머스크의 키치는 인류가 다행성 종이 되는 것. 한 친구의 키치는 어떤 회사를 만들어서 사회에 기여하는 것.

혹은 사비나, 테레자, 토마시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키치는 어떤 풍경, 온기.

대체로 창업에 도전하는 이들에게는 본인만의 미션 또는 캐시라는 키치가 존재하는 것 같다. 혹은 그걸 찾기 위해 스스로 창업을 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키치와 격리되어 철저히 직업으로서 창업을 대할 수도 있겠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가벼움을 무거움으로. 진지한 것으로.. 일평생 (아닐수도) 도달하고자 하는 지향점으로. 기꺼이 견뎌낼 만한 무언가를 가지고 산다.

세상 모두가 키치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들은 키치의 존재를 알거나 혹은 모른다. 주어진 키치 속에서 사는 사람에게 키치란 해체되는 경험이 없는 한 영속하여 세계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키치를 자각한 사람은 키치를 선택할 수 있으니, 또한 버릴 수도 있다. 그들에게 키치는 소꿉놀이 같은 것이다. 또한 연극 같은 것, 거짓말 같은 것이다.

자연스럽게 파블로를 생각한다. 황야의 이리에 나온 그 파블로. 헤세가 가지고 싶어하였던 유머. 세상이 키치로 가득한 것을 알게 된다면 유머는 자연스럽다.

나에게는 에에올의 키치가 통하지 않았다. 위대함을 좇는 편이 더 와닿는다.

나는 기질적으로 타인에 대한 민감도가 낮다. 그렇지만 동시에 내가 비교열위에 처하는 느낌을 받으면 견디지 못한다.

나의 키치는 사람을 서열화 하고 내가 우위에 서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을 내가 선택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내게 무척 무거운 가치였다. 비교하지 말라는 말을 수천번 들어도 여전히 위로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나는 이제 키치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걸 버릴 수 있다. 혹은 내가 원하는 쪽으로 좀 더 날카롭게 다시 설계할 수도 있다. 키치는 나의 취향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키치는 인간 조건의 실재로부터 도피하려는 모든 사람의 공통된 미학적 이상이다.
하지만 그 이상이 무엇인지는 개인의 취향에 달려 있다.

나의 취향..

나는 내가 인정하는 것들로 인정받고 싶다. 나는 시각적으로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을 만들고 싶다. 오히려 개성이나 독창성은 어찌보면 크게 중요하지 않다. 효율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희소한 것에 더 가치를 두는 편이다.

내가 감동하지 못한다면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도 않다.

제품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그런 무언가를 만들고 있지는 않다. 아이디어에서부터.

나는 우울했지만 죽기보다는 살고 싶었다. 키치는 살아가는 하나의 태도이다. 키치를 고를 수 있는 사람은 허무함을 극복하는 각자의 정답을 발견한 사람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본인이 의미를 부여하는 것 외에는 무엇이라 할지라도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유머로 화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지금 나의 키치는 지금 만드는 서비스의 로그인 페이지 같은 무언가이다. 이것보다 적절한 표현을 찾게 되면, 키치에 대해 더 이야기 할 것이 생기면 또 글을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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